시작하며
봄이 되면 괜히 바다가 보고 싶다. 따뜻한 햇살 아래, 걷기 좋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바람을 맞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남해로 향했다. 여러 갈래로 이어지는 남해 바래길 중 이번엔 11코스를 선택했다. 출발은 선구마을, 종착은 다랑이마을. 계절의 변화가 또렷이 담긴 이 길은 그 자체로 조용한 여행이었다.
1. 남해까지의 거리, 서울에서 출발한 오후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남해까지 가는 직행버스는 대략 4시간 정도 걸린다. 창밖 풍경을 보며 멍하니 있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도착은 오후 6시쯤. 남해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바닷바람에 실린 온기가 느껴졌다.
숙소는 터미널 근처에서 가까운 모텔을 잡았다. 오래된 곳이었지만 내부는 깔끔했고, 방이 예상보다 넓었다. 하루 묵고 길을 걷기엔 딱 적당했다.
2. 저녁 한 끼, 오래된 갈비집에서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뒤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섰다.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오래된 돼지갈비집을 발견했다. 메뉴는 단출했지만 정겨웠다. 최소 주문이 3인분부터라 혼자 먹기엔 많았지만, 배고픔이 이겼다.
얇게 썰린 갈비는 숯불에 구워 먹는 방식이었고, 소금만 살짝 찍어도 충분했다. 불판 아래로 기름이 쏙 빠져서 기름지지 않고 담백했다. 조미료 맛 없이 고기 본연의 맛이 살아 있었고, 밑반찬도 과하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실내는 낡았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그 분위기가 편했다.
3. 조용한 아침, 시장 골목의 식당
다음 날 아침, 시장 안쪽의 작은 식당에서 백반 정식을 먹었다. 가격은 1만원. 쑥국, 갓 튀긴 생선, 나물 반찬이 담긴 쟁반은 투박했지만 정성스러웠다. 특히 쑥국은 향이 깊었고, 밥과 함께 먹기에 부담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잠깐 시장을 둘러봤다. 상인들은 분주했고, 정육점, 반찬가게, 채소 좌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직은 한산한 분위기였지만, 그런 조용한 일상 풍경이 오히려 좋았다.
4. 선구마을에서 바래길 11코스를 걷다
아침 식사 후, 선구마을로 향했다. 바래길 11코스의 시작점이다. 작은 어촌마을인 이곳은 마당마다 꽃이 피어 있었고, 골목 안엔 빨래가 널려 있었다.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자갈이 깔린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하니, 바닷소리가 가까워졌다.
걷는 길은 대부분 완만했다. 안내 표지판도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발밑에 바람이 스며들고, 등 뒤로 햇빛이 느껴졌다. 파란 하늘 아래, 연둣빛 들판이 펼쳐졌다. 말없이 걷는 시간은 마음을 비우기에 충분했다.
5. 향촌마을을 지나며
선구마을을 지나 바래길을 따라 걷다 보면 향촌마을이 나타난다. 작고 조용한 이 마을엔 밭이 많았고, 이맘때면 마늘밭이 푸르게 자라난다. 봄 햇살을 받으며 밭일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어쩐지 정겹다. 고개를 들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발밑엔 작고 들쭉날쭉한 논길이 이어진다.
길은 단조롭지 않고, 산길과 들판, 마을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중간중간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도 보이고, 안내판 덕분에 길을 놓칠 염려도 없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걷는 여유가 이렇게 좋았던가 싶을 정도로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6. 다랑이마을의 유채꽃 풍경
드디어 다랑이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남해에서도 특히 유명한 유채꽃 명소다. 계단식 논 사이로 노란 유채꽃이 층층이 피어 있고, 그 사이로 걷는 길이 이어진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노란 물결이 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풍경이다.
언덕 위에 있는 정자에 올라서면, 꽃과 바다와 붉은 지붕의 조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햇살을 받아 더 밝아진 유채꽃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느껴진다. 어디를 바라봐도 사진이 되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이 계절에만 가능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 점심 한 끼, 깔끔한 쌈밥과 전
다랑이마을 아래쪽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멸치쌈밥과 해물전을 주문했다. 멸치는 짜지 않고 고소했고, 깻잎과 상추에 싸서 먹는 방식이 무척 잘 어울렸다. 해물전은 큼직하게 썰린 해물이 넉넉히 들어 있어 씹는 맛이 좋았고, 바삭하게 구워진 반죽이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유자 막걸리를 곁들였는데, 달지 않고 향만 은은하게 남아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줬다. 식사를 하면서도 창문 너머로 유채꽃이 보였고, 그렇게 눈과 입이 함께 만족한 점심이었다.
8. 민박에서 보내는 조용한 밤
식사 후에는 미리 알아본 민박집으로 이동했다. 마을 안쪽, 다랑이논이 내려다보이는 ‘넓은바다집’이라는 민박이었다. 번화가와 떨어져 있어 더 조용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방은 넓고 깨끗했으며, 욕실과 냉장고 등 기본적인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저녁은 민박집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직접 기른 상추, 2년 묵힌 김치, 갓 지은 밥이 함께 차려졌다. 음식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이 느껴졌다. 쌈장에 고기를 찍어 먹고, 유채꽃 사이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으니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며
남해에서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아도 좋았다. 걷고, 보고, 천천히 식사하고, 조용히 쉬는 흐름만으로도 충분했다. 봄날의 햇살과 바람, 꽃과 바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다음 해에도, 또 이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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