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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브이로그

한라산 기슭 깊숙한 오름, 영아리오름에서 만난 봄 야생화

by 김도현 여행길 2025. 4. 16.

시작하며

제주에는 수많은 오름이 있지만, 그중에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오늘 소개할 영아리오름은 바로 그런 곳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한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접근이 쉽지는 않지만,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삼나무 숲, 화산암이 흩어진 분화구, 이른 봄을 알리는 야생화들까지… 걷는 내내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오름은 흔히 '서영아리오름' 또는 '용와이오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 숲으로 들어서기 전, 억새밭이 맞이하는 길

첫발을 들이면 억새가 누렇게 마른 벌판이 펼쳐진다. 가을의 끝자락이라면 억새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면부터 마음을 끈다.

멀리로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고, 이곳이 얼마나 조용하고 깊은지 한눈에 느껴진다.

 

2. 오래된 숲길, 삼나무와 편백이 자라는 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길이 이어진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조림 사업으로 조성된 이 숲은 지금은 너무 울창해 일부는 간벌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숲 냄새, 그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도심에선 쉽게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이 이 길에서 깨어난다.

 

3.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돌담, 제주 선조들의 흔적

오름을 오르며 한쪽에 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담장이 나타난다. 이 돌담은 예전 목축을 하던 시절, 말이나 소가 넘어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쌓았던 것이다. 일부는 밭 경계용 돌담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수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이 담장은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삶과 자연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느끼게 해준다.

 

4. 습지와 동백꽃,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풍경

삼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쪽으로 열린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바로 '영아리흘'이라는 이름의 습지다.

건기에는 물이 거의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주변 동백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붉은 꽃잎이 흩뿌려져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정적인 풍경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게 만든다.

 

5. 분화구 안쪽, 야생화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는 곳

습지를 지나 분화구 안으로 들어서면, 낙엽이 수북이 쌓인 땅 사이로 샛노란 꽃과 연보랏빛 들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복수초, 현호색, 노루귀 같은 야생화들은 늦겨울부터 봄까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곳곳에는 화산 활동으로 튀어 오른 바위들이 흩어져 있고, 가시덤불과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오히려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6.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북사면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뿌리째 뽑혀 누운 삼나무가 눈에 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었는지 짐작이 간다.

정상 부근에는 삼각점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주변엔 박새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곳은 다른 오름보다 사람이 많이 다녀간 흔적이 적어서 그런지 식생이 더 건강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나무 사이로 한라산의 봉우리가 고개를 내민다. 바로 그 순간, 풍경이 확 열리며 제주 중산간의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삼형제오름부터 한대오름, 바리메오름, 폭낭오름까지, 마치 지도 위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야가 펼쳐진다.

 

7. 바위가 있는 정상, 그리고 신비로운 정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키가 훌쩍 자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키 작은 소나무들이 언덕을 점령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풍경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는 부부석이라는 이름의 쌍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바위는 마주 보고 선 두 개의 거석으로, 오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이다.

쌍바위 주변에는 또 다른 바위 무리들이 흩어져 있다. 예전 사람들은 이곳을 신령한 기운이 서린 곳이라 여겼다고 한다. 크고 작은 여덟 개의 봉우리가 서로를 감싸듯 이어져 있는 오름의 구조도 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8. 가장 탁 트인 조망, 제주 중산간이 한눈에

쌍바위에 올라서면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쾌하다. 동남쪽으로는 한라산 정상인 부악이 선명히 보이고, 북쪽으로는 왕이메오름과 고수치오름이 가까이 다가온다.

서쪽으로는 금악리에 위치한 금오름까지 시야가 닿는다. 한라산 자락 아래 펼쳐진 나인브리지 골프장까지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사방이 막힘 없이 탁 트여 있어, 그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제주의 다양한 풍경이 눈에 담긴다.

 

9. 하산길과 남서 사면의 풍경

정상을 지나 서사면으로 내려가는 길은 꽤 가파르다. 걷는 길에는 화산암이 박혀 있고, 낙엽이 쌓여 있어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기 쉬운 구간도 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보면 삼나무 숲이 다시 나타나고, 그 사이로 남서부 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서귀포 앞바다 위에 떠 있는 범섬, 안덕면의 산방산, 대정읍 해안의 송악산과 단산까지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온다.

억새가 무리지어 자라는 평지에 들어서면, 산방산과 송악산은 다시금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