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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창업자 아내, 변 여사의 전생! 정주영과의 특별한 인연"변 여사의 우아한 삶: 현대그룹 창업가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이야기"

맥스킴 2024. 1. 16.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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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eV3Bq2fQH8?si=Gqpu7Rk88pU__PM_

안녕하세요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 맥스킴입니다.

오늘의 영상에서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의 사모님

변중석 여사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변중석 여사는 강원도 통천군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과 결혼 전에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 변 여사는 아버지의 농사 일을 도우며 자라면서 학교는 가지 못했지만 서당,

교회, 야학 등을 다니면서 교양을 쌓았습니다. 

결혼은 정 회장의 네째 숙부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변 여사의 성품에 관심을 가졌던 숙부는 정주영에게 맞선을

주선했지만 변 여사의 가족은 결혼에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주영 가족이 가난하고 형제가 많아 변 여사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주영은 서울의 쌀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변 여사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 것은 몇 년 전 큰 오빠가 정주영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설득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때 정회장은 스물한 살, 변 여사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결혼 직후 정주영은 아내에게 3개월 기다려 달라며 곧 서울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3개월 후 변 여사는 남편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낙산이라는 산동네에 있는 허름한 판잣집이었습니다. 

 

변 여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시골에는 작은 집에 살아도 이 정도로 힘들게 사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서글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은 서울에서 사는 방식이라고 변 여사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의 사업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쌀가게는 일제가 자위 판매를 금지하고 배급제를 시행한 탓에 어려움을 겪었고, 

자동차 수리 공장은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면서 망했습니다. 

 

하지만 정주영은 굴하지 않고 평소에 신용이 높았던 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변 여사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는 친정 식구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변 여사의 친정은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간 후에는 

분단으로 인해 소식이 끊긴 것입니다.

 

인터뷰에서 정주영은 해방 전인 일제 시대에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돈을 벌어서 가자"고 말했지만, 현재 그에 대한 생각으로는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솔직한 감정을 나눴습니다.

 

정주영과 변 여사의 집은 인왕산 아래에 위치하며, 자연의 소리가 가득한 고요한

 곳에 자리했습니다. 비록 현대그룹을 이끄는 중이었지만, 정주영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청운동 자택은 재벌의 명성과는 거리가 먼, 간소하고 소박한 집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5시에 정주영의 방에 불이 켜지면 하루가 시작되고, 6시에는 해외 지사에서의 

보고 전화가 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6시 반에는 정주영이 식당으로 가는데, 식탁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식사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정주영의 원칙이었습니다. 

 

오전 7시에는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중에서 나왔습니다. 정주영은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설레여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방문하는 손님들은 변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돌려보내지 않고, 매년 고아원을 찾아주었습니다. 

 

변 여사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수녀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우체부가 집을 찾아왔을 때도 변 여사는 따뜻한 점심을 대접했고,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 값을 깎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변 여사가 시장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기뻐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며, 그룹이 성장함에 따라 직원 식당의

 주방장이 되어 구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메주를 나눠주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치며, 나중에는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한

 정주영과 변 여사. 그들의 삶은 변 여사의 기여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변 여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매일 새벽에는 남편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강릉에서 바다물을 가져와 순두부를 만들어 옛 두부 맛을 살리려 노력한 변 여사는 

그녀의 일과를 기자에게 소개했습니다. 

"저는 일이 끝나면 가끔 아줌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데, 뉴스를 열심히 시청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나오면 기분이 매우 좋아져요. 

회장님이 오시면 저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텔레비전을 끄지 않아요.

 10시나 11시에도 집에 돌아와서도 회장님은 신문만 보시다가 주무시곤 하셔요."

 

정 회장과 변 여사는 함께 2층에서 머물다가 변 여사의 방이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들 몽준의 결혼식을 앞두고 패물을 보관하고 있던 변 여사의 방에 도둑이 침입했습니다. 

 

변 여사가 도둑에게 발각되자 도둑은 휘발유를 뿌리며 위협하며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도둑과 변 여사 간의 대화에서 도둑은 타협적으로 행동하자

 변 여사는 도둑을 달래었습니다

 

. 하지만 도둑은 패물과 200만 원을 쥐고도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요구했지만,

 변 여사는 더 이상 돈이 없다고 맞서 싸웠습니다.

 도둑은 현대건설 회장 집이 이따위인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며 그냥 떠났습니다.

 

다음 날, 변 여사는 정 회장에게 "앗, 회장님, 저 죽을 뻔했어요. 

도둑이 저를 묶어놓고 몽준이의 패물을 가져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정 회장은 아내의 걱정을 무시하고 도둑을 왜 내 방으로 안 데려왔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변 여사는 도둑이 남편에게 문제를 일으킬까봐 불안해하며 죽을까 걱정하였지만, 

그녀의 걱정을 이해하지 않고 타박을 받아서 서운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변 여사는 2층을 꼴보기 싫어서 아래층에서 자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청운동 자택이 정몽구 회장을 거쳐 손자인 정의선 회장에게 이어져 

현대그룹의 중심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회장 부부의 제사는 이 자택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에서 정주영 회장은 아내를 칭찬하며, "아내는 패물하나 가진 적이 없고

 화장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뜰하게 집안일을 도우며 재봉틀과 장독대, 애들을 키우는 데 그쳐있다

. 그녀가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 존경스럽다.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변 여사도 자신의 재봉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 재봉틀로 대부분의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어요. 

이 재봉틀로 치밀하고 섬세한 솜씨로 옷을 만들어내는 것은 제가 큰 즐거움입니다.

 

 명절 때는 손자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것이 특별한 기쁨이에요. 

이 재봉틀은 우리 가족의 보물이고, 사진첩은 제 인생을 담은 소중한 미천이에요."

 

마트 종업원들이나 동대문시장, 포목점 주인들 역시 변 여사의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용산 청과물 시장에서는 변 여사를 단골로 삼았던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대량의

 과일과 채소를 구매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할머니가 용달차에 실려 운전사 옆자리에 타고 사라지면 그 할머니가 

현대그룹 회장 부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변 여사는 자신의 앞차가 한 대 있지만 

시장을 보러 가는 것과 용달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어느 해 정월에 복조리 장사가 조리값을 받으러 왔는데 변 여사를 보고

 "사모님 안 계시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언제나 집안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했던 변 여사. 그러나 그녀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돌려보내지 않고, 매년 고아원을 찾아주었습니다.

 변 여사에 대해 평소 친했던 한 수녀는 그녀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체부가 집을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따뜻한 점심을 대접해주었고,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 값을 깎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변 여사가 시장에 방문하면 사람들이 무척 반갑고 감사해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지기도 했으며, 그룹이 성장함에 따라

 직원 식당의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매년 메주를 나눠주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쳤습니다. 

나중에는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삶의 모습은 

며느리들에게도 전해졌으며, 항상 조심스럽고 겸손하며 남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시간도 겪었습니다. 

아들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후 정몽우 역시 생을 마치면서 그녀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정몽우의 아들인 정재선이 현재 노현정의 남편으로 있습니다. 

 

변 여사는 세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습니다.

녀는 아들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일이 가장 슬픔으로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변 여사는 2007년에 86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정 회장은 변 여사를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했으며, 아내에 대한 존경을 자주 표현했습니다.

 

변 여사는 60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사람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것이 없다면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번 것도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생각했으며, 변 여사를 보면서

현명한 아내는 조용한 아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변 여사는 남편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서 마

 

음을 전하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그분 몰래 어떤 차인지 타보기도 했다. 대견스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 생각으로는 과연 될까 하는 일을 많이도 이루었다. 

그리고 참으로 신통하게 여겨지는 일이 하나 있다. 

 

옛날 서울 낙산에 살 때 하루는 남들처럼 한강에 놀이를 갔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보트를 타다가 그분의 서툰 노질로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런 사람이 엄청난 조선소를 지었다니 마음 먹은 것은 꼭 달성하리라는 의지와

밀어붙이는 힘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 비결은 간단하다.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성공의 비결은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말을 남긴 글입니다.

 

 오늘 영상 잘 보셨나요?

돌아가신 분의 초상권 때문에 저는 다른 이미지와 영상을 넣었습니다.

많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48년생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입니다. 제 유튜브에서 검색 이름은 맥스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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