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경북 영양에서 만난 이월산 숲길, 그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원을 닮은 풍경과 일제강점기의 산업 유산, 그리고 지금은 꽃과 숲으로 다시 태어난 자생화 공원까지. 9km에 이르는 걷기 여행을 통해 저는 한 시대의 기억과 마주하며 발끝으로 시간을 밟고 왔습니다.
1. 자동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곳, 이월산 자생화공원
(1) 전망대에 서면 보이는 두 가지 풍경
자생화공원은 경북 영양군 31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조용한 공원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만 걸으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 서면 앞쪽으로는 계절별 야생화가 펼쳐지고 뒤편으로는 고대 신전을 닮은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1939년에 지어진 구룡화강산 성광장입니다. 이름부터 낯선 이 공간은 금, 은, 동 등 금속 광물을 정제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2. 고대 사원 같은 성광장을 지나며 떠오른 기억
(1) 성광장이란 어떤 곳인가?
성광장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던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성광장을 보며 문득 군함도 생각이 났습니다. 두 장소 모두 강제 노역과 착취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지만, 지금의 이월산 성광장은 자생화 공원으로 탈바꿈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외형만의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아픔을 자연으로 치유하는 한 방식처럼 느껴졌습니다.
📝 성광장의 역할을 쉽게 정리하면
- 구분 | 내용
- 이름 | 구룡화강산 성광장
- 시기 | 1939년, 일제강점기
- 기능 | 금·은·동 등을 정광(精鑛)으로 가공
- 특징 | 원광을 자르고 → 유용 광물만 선별 → 물기 제거 → 재련소로 이동 가능하게
3. 대티골 마을을 지나 단풍교로
(1) 감자꽃 피고 고추밭이 펼쳐진 마을길
성광장을 지나 200m쯤 걷다 보면 대티골이라는 작은 마을로 접어듭니다. 마을 이름부터가 정겹습니다. ‘큰 고개’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밭에는 감자꽃이 하얗게 피어 있고, 그 앞에는 옥수수, 파, 상추, 가지, 고추, 호박 등 다양한 작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 대티골에서 마주한 풍경들
- 밭 | 감자꽃, 옥수수, 고추 등 다양한 채소
- 마을 | 황토집, 대티골 주민 쉼터
- 조형물 | 야생 동물 모형, 자연 치유 테마의 조형물
- 단풍교 | 가을이 되면 단풍이 붉게 물드는 구간
(2) 대티골 단풍교와 단풍 터널
단풍교를 건너자마자 맞이한 터널 같은 숲길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계절이 달라지면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며 걷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단풍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데크길은 햇빛이 반사되며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잎사귀들이 반짝였습니다.
4. 숙길을 따라 영양터널까지, 과거를 품은 숲길
(1) 흙길 따라 걷는 금강송 숲
단풍길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흙길 숙길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별거 없을 줄 알았지만, 점점 이 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흙길은 발바닥에 부담이 없고, 양옆으로는 높이 솟은 금강송이 서 있었습니다.
특히 진등이라 불리는 능선길은 경상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지형 표현이었는데, 이 진등을 따라 걷는 기분이 편안했습니다. 가벼운 바람과 함께 걷는 숲길은 어느새 도시에서의 답답함을 씻어주고 있었습니다.
📝 이 구간에서 기억해 둘 포인트들
- 자생화공원 → 영양터널 | 총 9.3km, 도보 약 2시간 50분
- 대티골 입구 → 치반목 3거리 | 약 4.7km
- 치반목 3거리 → 영양터널 | 약 2.7km
- 전체 숙길 | 걷기 좋은 흙길, 울창한 금강송 숲길
- 역사 | 일제강점기 때 광물 운반용 도로를 복원한 길
5. 도착지, 느린 우체통이 있는 영양터널
영양터널에는 조금 특이한 게 있었습니다. ‘느린 우체통’도 아니고 ‘제멋대로 우체통’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죠. 그 이름처럼 편지를 넣으면 언젠가 도착하는, 정해진 시간이 없는 우체통입니다. 마치 오늘 걸은 길처럼, 정답이나 규칙이 아닌 기억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며
이월산 자생화공원과 숲길 트래킹은 자연 속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뿐 아니라, 잊힌 역사와 마주하고 싶은 분들께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잎새 하나, 길 하나에도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그 위에 햇살과 바람이 더해져 치유의 숲이 되었습니다. 영양의 이 길을 걸으며 저 역시 많은 것을 되짚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걷고 싶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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